일이 막히면, 저는 사람이 아니라 길을 봅니다
일이 막히면 대부분 사람을 먼저 봅니다. 담당자가 느려서, 직원들이 관심이 없어서, 현장이 따라오지 않아서.
저는 길을 먼저 봅니다. 일이 어디서 들어와서, 누구를 거쳐, 어디서 멈추는지. 그 길이 막혀 있으면 누가 그 자리에 앉아도 일은 멈춥니다. 반대로 길이 제대로 나 있으면,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서도 일은 돌아갑니다.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일이 지나가는 길입니다.
이 방식은 어디서 왔나
제 출발은 공학이었습니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산업공학을 공부했고, 세부 전공은 시스템 분석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들어간 것 대비 나오는 것을 최대로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목적이 여러 개일 때 무엇을 먼저 둘지 정하고, 결과를 크게 좌우하는 핵심 변수를 찾아내는 일이죠.
대학원에서는 여러 댐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어 운영하는 '댐군 연계운영'을 연구했습니다. 물을 언제, 어느 댐에서, 얼마나 흘려보낼지. 국토해양부와 한국수자원공사의 '한강수계 실시간 저수지 운영시스템 구축' 연구에 참여했고, 시뮬레이션과 최적화 기법을 비교해 둘의 장점을 함께 쓰는 방법과 여러 기준 사이에서 결정을 돕는 의사결정 지원 시스템을 연구했습니다. 석사 과정 중에 스카우트되어 한국수자원공사 연구원으로 2년 동안 시스템 분석과 모형 구축을 했습니다.
연구 자료
· 수자원시스템의 효율적 운영을 위한 시뮬레이션과 최적화 기법의 원론적 비교 연구 — 한국수자원학회논문집 46권 4호, 2013 (KCI 등재)
· 수자원시스템의 효율적 운영을 위한 시뮬레이션과 최적화 기법의 원론적 비교 및 활용방법에 대한 연구: 한강수계 중심으로 —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3
· 댐군 연계운영에서 시뮬레이션 기법과 최적화 모형 활용기법의 원론적 비교 및 개선방법에 대한 연구 — 한국수자원학회 학술발표회, 2012
· 다기능보 주변 다차원 정밀수리분석 시스템 개발 및 적용 / 정밀지형구축 자동화 시스템 개발 — 대한토목학회, 2011
· 댐 군 연계운영을 위한 다기준 의사결정 지원 시스템 — 한국경영과학회 추계학술대회, 2009
· 한강수계 실시간 저수지 운영시스템 구축(분석 모형 개발) 보고서·부록·사용자 지침서 — 국토해양부·한국수자원공사, 2008 (고려대학교 산학협력단 공동)
제 이력을 보면 다들 고개를 갸웃합니다. 수자원 연구원, 영어 강사, 보험 영업, 교육, 전략기획, 마케팅. 하나도 이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한 번도 다른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늘 같은 일을 해 왔습니다. 문제점을 찾고, 개선하고, 최적화하는 일. 그때는 수자원이었고 지금은 보험일 뿐입니다. 어떤 산업이든, 어떤 직무든 상관없습니다. 겉모습은 달라도 본질은 통하고, 저는 그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물은 누구 탓을 하지 않습니다. 막히는 곳과 흐르는 곳, 구조만 있을 뿐입니다. 연구원 시절 몸에 밴 그 습관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사람보다 흐름을 먼저 그려 보는 습관.
현장에서 본 것
그 뒤 6년 동안은 보험 영업을 했습니다. 큰 조직이 아니라 아주 작은 GA에서, 혼자 고객을 만나는 개인 영업이었습니다. 시장 상인과 상가를 무작정 찾아가는 개척 영업부터 블로그와 SNS를 통한 온라인 영업까지 다 해 봤습니다. 생명보험·손해보험·변액보험 자격은 물론 증권투자권유대행인, 펀드투자권유대행인, 퇴직연금 모집인 자격까지 따며 보험과 금융을 넓게 공부했습니다.
현장에서 저를 가장 힘들게 한 건 거절이 아니었습니다. 보험과 보험 영업인을 바라보는 시선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쉽게 보험 영업인을 하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선이 생긴 이유도 보였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손해를 보는 방식으로 보험에 가입한 고객을 너무 많이 만났습니다. 보험사와 설계사와 고객 사이의 정보 차이가 크고, 그 차이의 가장 큰 피해자는 고객이었습니다.
문제는 몇몇 설계사가 아니라, 산업의 구조와 잘못된 방향의 교육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꾸고 싶었습니다. 설계사는 존중받고, 고객은 손해 보지 않고 보험에 가입하는 것. 그런데 혼자 고객 한 명 한 명을 만나서는 바꿀 수 있는 게 너무 적었습니다. 산업에 영향을 주려면 힘이 있어야 했고, 이 산업이 어떤 구조로 움직이는지 안에서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영업을 내려놓고 본사 스탭이 되기로 했습니다. 첫 자리는 교육담당이었습니다. 설계사들의 생각이 바뀌면 현장이 바뀔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교육팀장, 교육 운영, 콘텐츠 담당 세 사람이 하던 일을 혼자 맡았습니다. 교육 날짜를 고정하고, 신청 방법을 자동화하고, 콘텐츠와 교육을 연결했습니다. 한 달 300~400명이던 온라인 교육 신청이 1,000명을 넘었습니다.
그러면서 알게 됐습니다. 사람의 생각보다 먼저 바꿔야 할 게 있다는 것을. 좋은 교육도 신청하는 길이 복잡하면 닿지 않고, 공지는 현장까지 내려가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부터 제 일은 막힌 길을 찾아 다시 내는 일이 됐습니다. 8개월 뒤 대표의 제안으로 전략기획실로 옮겼습니다.
이 관점을 일로 옮기면 네 단계가 됩니다. 기획, 설계, 제작, 운영. 전략기획실에서 맡았던 제안제도 이야기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1. 기획 — 무엇을 할지보다, 어디서 막히는지
2022년 11월, 제안제도를 넘겨받았습니다. 2020년 9월 시행 이후 235건이 접수된 제도였지만, 제가 맡기 직전 두 달은 한 달에 4건, 3건이 전부였습니다.
숫자만 보면 관심의 문제였습니다. 실제로 제가 처음 적은 문제도 '관심'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단계 더 들어가 보니, 관심이 줄어든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 관리가 멈춰 있었습니다. 수많은 제안이 '검토', '보류'라는 이름으로 쌓여만 갔습니다.
- 지난 제안을 볼 수 없었습니다. 처음 용기 내어 낸 제안이 '중복 제안'이라며 인정받지 못하자, 그 직원은 다시는 제안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이미 제안됐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던 겁니다.
- 실행이 멈춰 있었습니다. 쌓인 제안이 정리되지 않으니, 새로 들어온 제안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관리가 안 되니 실행이 안 되고, 실행이 안 되니 관심이 사라지는 고리. 직원들은 무관심한 게 아니라, 합리적으로 침묵하고 있었던 겁니다.
기획은 아이디어를 내는 일이 아니라, 막힌 지점을 정확히 짚는 일입니다. 문제를 '관심', '관리', '실행' 세 개로 나누고 나니, 해야 할 일도 세 갈래로 분명해졌습니다.
2. 설계 — 사람이 아니라 흐름에 일을 맡긴다
먼저 쌓인 것부터 정리했습니다. 다섯 개였던 진행 단계(검토·보류·종료·진행·완료)를 세 개(완료·종료·진행)로 줄였습니다. 단계가 많을수록 멈출 곳도 많아집니다.
정리는 세 번에 나눠 했습니다. 과거 자료와 당시 심사 결과를 하나하나 대조하고, 각 부서 팀장들의 확인을 받아, 2023년 2월까지 접수된 274건을 완료 48건, 종료 127건, 진행 98건으로 나눴습니다. 남은 98건은 부서장 전략회의를 네 차례 열어 실행 여부와 담당 부서를 정했습니다. 원칙은 두 가지였습니다. 2/3 이상 찬성해야 진행한다. 꼭 필요하지 않거나 시급하지 않은 건은 과감히 종료한다. 불필요한 개발을 줄이는 것도 설계입니다.
그다음은 앞으로의 길이었습니다. 문제의 뿌리는 운영자 한 사람이 모든 제안의 실행을 혼자 챙기는 구조였습니다. 그 한 사람이 바쁘거나 자리를 비우면 제도 전체가 흔들립니다. 그래서 흐름을 이렇게 바꿨습니다.
- 제안은 전산으로 접수되고, 한 달 치를 모아 다음 달 첫날에 심사합니다.
- 심사 후 7일 안에, 날짜와 시간을 고정한 월 1회 부서장 전략회의에서 진행 여부와 담당 부서를 정합니다.
- 담당 부서 팀장이 그 제안의 실행과 완료까지 책임집니다. 전산 개발이 필요하면 전산팀과, 아니면 제안자와 직접 풀어 갑니다.
운영자는 모든 걸 하는 사람에서, 흐름이 막히지 않는지 지켜보는 사람이 됐습니다. 좋은 설계는 특정한 사람의 성실함에 기대지 않습니다.
3. 제작 — 그림을 실제 길로 만든다
종이 위의 흐름은 한 달이면 잊힙니다. 그래서 제안의 접수부터 완료까지를 회사 전산 안으로 옮겼습니다. 화면을 어떻게 구성하고 어떤 순서로 처리되게 할지는 제가 직접 설계하고 개발을 총괄했습니다.
모든 제안에는 '요청 → 진행 → 완료'라는 상태가 붙고, 담당 팀장이 직접 바꿉니다. 누가 언제 무엇을 냈고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가 화면에 남는 순간, 제안은 더 이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제작은 설계를 '누구나 따라갈 수 있는 길'로 바꾸는 일입니다.
4. 운영 — 쓰게 만들고, 멈추지 않게 돌린다
길을 냈으면 사람이 다니게 해야 합니다. 매주 목요일을 '제안의 날'로 정했습니다. 맡은 첫 달인 2022년 11월, 17명이 18건을 냈습니다. 본사 직원 참여율이 한 달 만에 6%에서 37%로 올랐고, 제도가 생긴 이후 가장 많은 참여였습니다. 시스템을 바꾸던 2월에는 잠시 3건으로 줄었다가, 3월에 다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제안이 실제로 실행되기 시작했습니다. 회사 문서의 파일명 저장 방식을 하나로 통일한 것도 이 흐름에서 나왔습니다. 작은 변화였지만, "내 제안이 진짜 바뀌는구나"를 모두가 눈으로 확인한 순간이었습니다.
운영자로서 매달 한 일은 따로 있었습니다. 제안 유형별로 진행 속도와 특이점을 기록하고, 어디서 병목이 생기는지 살피는 일. 이 기록이 3~6개월 쌓이면 유형별로 완료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보이고, 그게 다음 운영의 기준이 됩니다.
운영은 끝이 아니라 다음 기획의 시작입니다. 돌려 보면 또 막히는 곳이 보이고, 그곳에서 다시 기획이 시작됩니다. 네 단계는 직선이 아니라 고리입니다.
사람을 바꾸려 하기 전에, 길을 바꿉니다
독려와 회의는 잠깐 사람을 움직입니다. 하지만 길이 막혀 있으면 그 힘은 금방 빠집니다. 길이 제대로 나 있으면, 아무도 애쓰지 않아도 일은 흘러갑니다.
그래서 일이 막힐 때 제가 던지는 첫 질문은 늘 같습니다.
"누가 문제인가"가 아니라, "이 일은 어디서 멈추고 있는가."
흩어진 일을 찾아, 구조로 만들고, 계속 돌아가게. 이것이 제가 일을 풀어가는 방식입니다.